원래는 연휴를 이용해 좀 쉬고 싶었던 거였다. 왜인지 좀 지쳐있었고, 좀 외로워졌더랬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아는 이 하나없는 낯선 곳에서 뒹굴뒹굴 낮잠도 자고 책도 좀 읽고 산보도 다니고 싶었다. 그래서 원래 알아봤던건 제주도 항공권&호텔 패키지. 30만원 정도면 2박 3일동안 꽤 괜찮은 호텔에서 수영도 하고 좀 노닥거리다 올 수 있겠다 싶었는데, 문제는 타이밍이였다. 놀러가야겠다고 맘을 먹은 시점이 연휴를 불과 닷새 앞둔 주말저녁이였으니 티켓이 남아있을 턱이 없었던 것. 아쉬운 맘에 '국내-제주' 페이지를 넘어 '해외-긴급모객'을 뒤적이다 제주 패키지보다 더 싼 상품을 발견했다. 바로 일본 1박3일 자유여행이였다. 보아하니 빡셈의 극치겠군. 난 쉬고 싶은건데, 이거 질렀다간 되려 피로곰 백마리만 더 몰고 오는거 아냐? 순간 고민했지만, 마우스 커서는 '예약'을 향해 스멀스멀 가고 있었다. 숙소수배와 여권사본전송, 최종입금 등 모든 절차는 반나절만에 끝났다.
몇 번의 해외여행 경험이 있지만, 혼자가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 호기롭게 질러놓고는 어딘지 좀 불안해져서는 지도랑 가이드북을 몇 번이나 뜯어보며 스케쥴을 분단위로 촘촘하게 짜고 동선도 완벽하게 그려서 A4지 3장 가득 빼곡히 채워넣어 오른손에 꼭 쥐고는 '자 이대로만이라면 내 여행은 완벽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스케쥴표가 없어도 얼마든 쏘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새벽 4시 반 비행기를 기다리는 일은 꽤 고역이였다. 리무진은 12시에 일찌감치 공항에 닿았고, 여행사 미팅시간은 2시였다. 어디선가 '새벽비행기 기다리다 졸다간 십중팔구 여행 못 간다'는 경고를 보았기에, 꼼짝없이 미팅장소인 A카운터 앞 벤치에 앉아 가이드북만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4시간 반을 기다려 탄 대한항공 전세기는 지친 초보여행자를 순식간에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데려다놓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6시였다.
원래 계획은 난바로 곧장 이동해 호텔에 짐을 맡긴 다음 오사카성으로 가려는 거였다. 무어,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 난바에 잘 가서 호텔까지 안녕히 잘 찾아갔거든. 근데 이놈의 호텔 입구에 에스컬레이터가 딱 한 대 설치되어 있는데(특이하게도 2층부터 시작되는 호텔이였다)이게 체크인 시간엔 상향으로, 체크아웃 시간엔 하향으로만 움직이는거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10시가 체크아웃 리밋타임이였으니 에스컬레이터는 무한 하향 운행만 반복할 수 밖에. 이튿날 체크아웃을 하면서야 옆길로 돌아가면 계단을 이용할 수 있단 사실을 알게됐지만, 어쨌든 당시로선 OTL 그 자체였다는. 뜨겁디 뜨거운 오사카의 태양아래 보따리를 칭칭 휘감고 비지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일단 아침을 먹기위해 도톤보리 중심가로 들어갔다.
가이드북을 뒤져보니 도톤보리의 맛집 중 '금룡라멘'이 24시간 운영된다고 써있었다. 오호 여길 가면 되겠구나. 두리번거리며 몇 분인가 걸어가다 무사히 라멘가게에 안착. 자판기에서 차슈 3점이 올라가있다는 6백엔짜리 일반라멘 티켓을 뽑아 씩씩하게 내밀고는 관광객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신나게 주변경관 사진을 찍어댔다. 이윽고 나온 뜨끈뜨끈한 라멘을 먹기 전 원형; 그대로 찰칵, 기록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거니와.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 더운 날씨에 뻘뻘 땀을 흘려가며 뜨거운 라면을 먹고있는 나는 역시 열혈 관광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 가득 맴돌았던 기억밖엔;;
일단 배를 채웠으니 이제는 정말 관광을 가야할 때. 오른손에 꼬옥 말아쥐고 있던 A4종이를 펴 계획을 살펴보니 그 시각 나는 오사카성에 가는 걸로 되어있었다;; 해서 이리저리 지하철을 타고 오사카성 앞으로 갔다. 작열하는 태양아래 봇짐을 앞뒤로 둘러메고 긴 파마머리 축 늘어뜨린채 굽있는 샌들 신은 발을 놀리고 있으려니 이뭐병이라는 말이 절로나왔다. -_-; 결국 성을 둘러싸고 있는 드넓은 공원을 지나 마침내 성 앞에 당도했을때, 머리는 고무줄로 질끈 동여메고 배낭을 뒤져 플랫슈즈를 꺼내신었다. 아아 비로소 진정한 관광객 모드 완성. 돌덩이 같은 짐들은 성 입구 물품보관소에 맡기고 비장한 각오로 첫 관광지인 성 안으로 진입했다.
화려한 겉모습관 달리 오사카성 내부엔 그닥 볼 게 없었다. 재건축 하면서 싹 뜯어낸 성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성 안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에 별로 관심이 안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걸 지은 놈;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인 터라 그의 업적;들에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거였다. 뷁. 도요토미 히데요시 따위 공 안 세워도 돼! 묘한 반발심;에 아침부터 이 곳에 오기위해 고생 한 것에 대한 분노;가 더해져 기분이 한껏 꿀꿀해졌다. 쳇. 안 되겠다. 어서 쇼핑이나 하며 기분전환 해야지. 투덜대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 유흥;과 환락;의 천국 도톤보리에 당도했다.
첫 쇼핑코스는 드럭스토아. 입구에 붙어있던 '휴족시간 480엔'에 낚여 들어간 이름모를 드럭스토아는 1층엔 약, 2층엔 코스메틱 용품, 3층엔 100엔짜리 물건들, 4층엔 100엔짜리 먹거리들로 꽉꽉 들어차있는 낙원이였다. 게다가 마치 빅맥지수처럼 네이버 네일동 회원들 사이에서 일본여행 갈 때마다 온 군데를 다 돌아다니며 가격을 비교해 올려 드럭스토어 물가지수;를 파악하게 만드는 화제의 클렌징폼 '퍼펙트 휩'의 가격이, 무려 내가 본 가격들 중 최저가였다! 4백엔대까지도 있다고 하던데 이 드럭스토어에선 샘플까지 묶어서 2백엔대에 팔고 있었다는. 으하하하 웃으며 언니꺼 하나 내꺼 하나해서 두갤 골라집고 4층으로 올라가 과자들을 쓸어담았다.
두번째 쇼핑코스는 GAP. 여름 끝물인지라 최저가세일이 한창이였다. 반팔티류는 일괄 9백엔! 반팔 블라우스들은 일괄 3천5백엔! 신나서 뒤적뒤적 고르고 있으려니 웬 점원이 다가와 한 블라우스를 들고 뭐라뭐라 설명해주었다. 못 알아 들었다고 말하기도 뭐해서 걍 '하이'를 연발하며 마저 뒤적이는데, 뭔가 끝이 올라간, 의문문임이 분명한 문장을 내뱉으시는거다? 그제사 어버버한 표정으로 '스미마셍.. 와타시와 강꼬꾸데스..'라고 했다. 어어 근데 이 분 갑자기 표정이 환해진다. '한국분이셨군요!'. 에에. 이름표를 자세히보니, 님도 강꼬꾸! 상냥한 강꼬꾸 언니님하의 도움으로 GAP에서 만족스런 쇼핑(티 한 벌, 블라우스 한 벌 샀다! 으하하 둘 다 완전 큐트큐트!)을 하고나와 시계를 보니 낮 1시. 자 이제 두시간만 버티면 체크인이다. -_-;; 두리번 거리다보니 가이드북에 나와있던 카레집이 보인다. 1인용 바 자리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오물오물 카레돈가스 정식을 먹고 나왔다.
숙소앞에 도착하니, 에스컬레이터는 여보란 듯 상향운행 중이였다. 체크인을 하고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아이고 피곤해. 하지만 나는 1박3일 여행객. 낮시간을 허투루 썼다간 하루를 고대로 날리게 되는거돠. 흐려져가는 정신을 붙들어메고 간단히 샤워를 마친다음 다시 밖으로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사랑하는 LUSH 가게가 있는 난바 파크스.
난바거리는 서울의 명동거리를 닮아있었다. 바둑판처럼 얽히고 섥혀있는 공간 안에 골목골목 빼곡히 들어차 있는 옷가게며 주전부리 가게며 게임방, 비디오방.. 중학교 1학년때였던가. 친구가 옷을 교환하러 간다며 첨으로 말로만 듣던 바로 그 젊은이의 거리 명동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설레서 어쩔줄 몰라했더랬지. 그 날 이후 이대, 신촌, 강남역 등에 차례로 진출하면서 뭔가 유행의 첨단을 걷는 아가씨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왕 뿌듯했었는데. 스물넷이 되어 일본 난바거리를 걷는 기분은, 또 다시 이만큼 자라 어른이 되어 신세계에 발을 담그는 기분이었다. 잼있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구석구석 헤집고 돌아다니다 북오프에도 가고(다부르에스 고마루이치-_-님들하의 CD는 없었다능. 캐상처..;;), 리쿠르 오지상 치즈케잌 가게에 들러 따끈따끈한 치즈케잌 한 상자도 사고, 난바 파크스에 들어가 LUSH며 COMSA ISM을 휘젓고 다니며 아이템들을 집어왔다. 가게의 캐셔언니들은 한결같이 계산전에 일어로 뭔가 물었다. '익스큐스미?'라고 웃으며 말하니 아하 하며 '프레젠또?'라고 되물으신다. 아 포장할꺼냔 거그나. '노. 이츠 마인'. 상냥하게 대화를 주고 받고 싶어도 이런 짧은 영어만 나가는거다. 흐. 그래도 언니들은 생글생글, 참 친절하기도 하셨다.

휘휘 난바를 휘젓고 들어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저녁으로 간단히 먹을 덮밥도시락과 술을 샀다. 티비를 켜니 마침 한일전 야구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흐뭇한 마음으로 술캔을 따 들고 내일 일정을 점검했다. 사전에 찍어둔 곳은 교토. 하지만 교토는 유적지가 많은 도시의 특성상 죙일 드넓은 성곽이며 길을 걸어야 하는 코스가 대부분인게다? 오늘 땡볕에 오사카성에서 삽질;한 걸 생각해보니 도무지 유적지 탐방을 할 용기가 나지 않는거라. 고민고민하다 눈 딱감고 사전정보습득게이지와 관계 없이 관광하기에 상대적으로 편할 것 같은 도시에 가기로 맘 먹었다. 이렇게 맘대로 바꿔도 잘 할 수 있을까. 살짝 불안했지만, 내 안의 목소리는 분명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애초부터 네 맘대로 지른 여행인데 뭘 망설여. 이 여행의 주인공은 온전히 너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근거없는 자신감마저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래, 도전이다 :D
오사카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은, 비장한(!) 각오와 함께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