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확신과 자존감 :: 2008/12/18 02:23

어른이 되자! 내가 누군지 알고 살자!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인터뷰



...(전략)

정혜신 : 당연한 거 아닐까? 나는 인간의 정신은 진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질적으로는 이전 세대가 이뤄놓은 게 후세의 생활에 편입되고 또 다음 단계에 올라가는 식으로 축적, 진화되지만 정신은 아니다. 부모의 학식이 자식에게 편입되는 게 아닌 것처럼. 모든 인간이 자기가 직접 체험해 보기 전에는 이해도 안 되고 설득도 안 된다. 그런데 요즘 주변을 보면 직접 몸으로 부딪치거나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과정이 철저히 봉쇄된다. 겪은 만큼 성장하고 시행착오나 실수도 해보면서 이걸 해석하고 자기 확신으로 연결되는 순환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곳곳이 막혀 있다. 사회적, 문화적, 가정적으로 모두 말이다.

김어준 : 결국 공교육의 문제와 연결된다. 우리 교육은 상위 1프로를 뺀 나머지를 낙오자로 만드는 시스템이다. 패배의식을 체계적으로 내면화한다. 명품 유행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낙오자가 된 99프로가 비싼 가방 메고 잠시라도 일류라는 착각과 위로를 받는 거지. 그래서 명품은 우리나라에서 과소비가 아니라 정신적 위로다.

정 : 불안이 없으려면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를 느껴 볼 수 있어야 자기 확신도 생긴다. 연애 등의 인간관계나 여행, 예술적 체험 같은 게 다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경험인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맨 뒤로 밀어놓는다. 인간관계만 해도 살아가는 데 그보다 중요한 재산이 없는데 학원 가고 칠판 보느라 관계맺기의 훈련도 당연히 밀린다. 흔히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도 내면적으로는 불행한 경우가 많은데, 대다수는 관계가 안 되기 때문이다. 이건 제대로 관계 맺을 수 있는 각성된 개인, 즉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결혼의 갈등도 같은 거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어른’이 아니면 사랑을 유지해나갈 수가 없다.

김 : 멋진 말이다. 이거 내 말로 써 달라.(웃음)

정 : 그래서 심리 상담을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내게 물어봐야 할 나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엉뚱한 사람에게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도록 돕는 과정인 거다. 스스로 생각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는 스몰 쇼크를 느낀다. 심리 관련 책을 읽으며 자기를 대입시켜 보면서 경험하는 지적인 깨달음과는 다른 유의 충격이다. 감성적 깨달음은 언제나 충격을 동반한다. 기업가들 상담을 할 때 ‘그때 당신은 뭘 느꼈나’ 물어보면 갑자기 사람이 멍해진다. 그러고는 느낌이 아닌 생각을 말한다. 그럼 재차, 생각 말고 당신의 느낌을 말해 달라고 하면 다시 블랙아웃이 된다. 그렇게 정지된 순간을 직접 느끼게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다. 내가 이런 존재구나, 내가 느낌 하나 없이 살아왔구나 하는.


자신감과 자존감의 차이

김 : 그 말은 내 식대로 말하면, 사람들이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는 거다. 영화 <데어 데블>을 보면 주인공이 장님인데 소리가 공간에서 부딪혀 돌아오는 걸 감지해 그 윤곽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그처럼 자기가 했던 행동이나 결정 등이 반향을 일으켜서 내게 되돌아와 만드는 윤곽선이 바로 자신이다. 그중에는 맘에 안 드는 것도 있지만 그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다. 그걸 받아들이면서 자신에 대한 관심이나 잘 보이려고 과도하게 하는 노력이 사라지며 만들어지는 게 자존감이고.

정 : 관심이 없어진다기보다 자기에 대한 타인의 시선에 매달리지 않게 되는 거지.

김 : 같은 말이다.(웃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과 자신감을 헷갈린다. 20대의 나를 생각하면 자신감은 있었다. 내 능력에 대한 신뢰. 하지만 그걸 남한테 입증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30대를 넘어가면서 나를 입증해 보이겠다는 강박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정 : 어떤 계기가 있었나?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도 마음의 변화 같은?

김 :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어느 날 문득 보니 내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남의 승인 필요 없이 그저 내가 생겨먹은 대로 즐겁게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20대엔 내가 이 정도입니다, 봐 주세요 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그런 생각 자체를 깡그리 잊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며 그로부터 즐거움을 누리는 데 집중하고 있더라.

정 : 그런 확신을 스스로 했기 때문에 외부에 연연하지 않는 거다. 돈이냐 사랑이냐의 문제도 고명한 선생님한테 물어봐서 답을 얻는 게 아니라 총수처럼 ‘제대로, 또박또박’ 살다 보면 자명해지는 거다. 절대적으로 내가 나를 느껴서 얻는 게 자존감이라면, 자신감은 외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김 : 자신감은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패배의식을 동반한다. 외부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이 제시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예를 들어 공부 잘해 남에게 인정받아 만들어진 자신감은 나보다 공부 잘하는 놈 앞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스스로 구축한 자존감은 남의 승인이 필요 없다. 물론 남이 날 좋게 봐 줬으면 하는 거야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니어도 자존감이 튼튼하면 나는 그대로다.

정 : 그렇게 자존감이 내재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뭔가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땐 내부 시그널도 금방 온다. 스스로를 견제하는 자아가 빠르게 작동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남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다 보면 불행하게 살 가능성도 낮아진다. 외적 상황이 자신을 몰아가도 스스로 그렇게 안 살도록 결정하게 되니까. 많은 부부들이 관계가 안 좋아도 애가 결혼할 때까지만 참고 산다고 하는데,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애가 행복하게 살 가능성은 무척 낮다. 부모의 행복하지 않은 삶을 공기처럼 마주하며 자란 아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을 삶의 예외적인 상황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가 불행해져도 문제의식이 별로 없다. 불행을 쉽게 수용한다. 행복을 느끼고 사는 부모와 산 아이는 자기 삶이 그런 조건에서 벗어나면 자기 안의 경계경보가 빠르게 작동한다. ‘내 삶이 왜 이래? 이건 아니잖아’ 한다.

(후략)...

기사등록 : 2008-12-17 오후 06: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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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 정신과전문의 정혜신 씨의 대담 중 일부. 온 몸의 세포가 곤두서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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